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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통일

900~936 · 신라 말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가 일어나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왕건이 936년 통일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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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별 이야기 (7)

900

견훤, 후백제를 세우다

900년 견훤이 무진주에서 완산주(전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후백제라 했다. 의자왕의 원한을 갚겠다며 옛 백제 땅 사람들의 마음을 모았다. 같은 해 궁예는 왕건을 보내 광주·충주·청주 일대를 평정했다.

왜?892년 무진주를 차지한 뒤 견훤은 세력을 전라 일대로 넓혔다. 완산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옛 백제의 중심지에 가까운 곳에서 "백제의 부활"을 내세우기 위해서였다.

그 뒤901년 견훤은 대야성(합천)을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했다. 이후 경상 서부와 충청 남부를 두고 신라·궁예 세력과 계속 다퉜다. 지도의 후백제 영역은 전라 일대만 칠한 추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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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1

궁예, 후고구려를 세우다

901년 궁예가 송악에서 왕을 칭하고 고구려를 잇겠다며 나라를 세웠다. 국호는 고려였지만 왕건의 고려와 구분해 후고구려라 부른다. 이때 궁예의 땅은 강원·경기와 황해 남부, 충주·청주 일대까지였다. 공주·상주 방면(904)과 평양을 비롯한 패서 북부(905)는 그 뒤에 얻었다.

왜?궁예는 898년 송악을 도읍으로 삼은 뒤 900년 왕건을 보내 광주·충주·청주 일대까지 차지했다. 세력이 커지자 고구려 부활을 내세워 옛 고구려 땅 사람들과 송악 호족의 지지를 모았다.

그 뒤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상주 등 30여 주현을 차지했으며 공주 장군 홍기가 항복해 왔다. 905년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평양 성주의 항복과 패서 13진을 얻었다. 그래서 901년 지도에는 이 지역들이 들어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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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

왕건, 고려를 세우다

폭정을 일삼던 궁예를 신하들이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했다. 국호를 고려라 하고 이듬해 송악(개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왜?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고,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관심법"으로 신하는 물론 부인과 아들까지 죽였다. 민심이 떠나자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이 송악 호족 출신으로 신망이 두터운 왕건을 추대했다.

그 뒤왕건은 각지 호족과 혼인 관계를 맺고(부인이 29명) 세금을 줄이는 포용 정책으로 지지를 넓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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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

공산 전투

견훤이 경주를 습격해 경애왕을 죽였다. 신라를 도우러 내려간 왕건은 대구 공산(팔공산)에서 크게 패했고, 신숭겸이 왕건 대신 전사했다.

왜?신라는 힘이 없었지만 "천 년 왕조"의 정통성이 있어, 신라를 끼는 쪽이 명분을 가졌다. 경애왕이 고려 편에 서고, 926년 고려에 인질로 가 있던 견훤의 조카가 갑자기 죽자 견훤은 화친을 깨고 신라를 응징하러 나섰다. 경애왕을 죽인 뒤에는 김부를 경순왕으로 세웠다. 신라를 지켜야 "보호자"의 명분이 서는 왕건은 정예 기병 5천을 이끌고 직접 내려왔지만, 서둘러 온 소수 병력이 공산에서 포위당했다.

그 뒤신숭겸이 왕건의 갑옷을 입고 수레에 올라 적을 끌어낸 사이 왕건은 탈출했다. 이후 한동안 견훤이 주도권을 쥐었다. 팔공산·안심·반야월 같은 대구 지명이 이 전투에서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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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

고창 전투

고창(안동)에서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크게 이겼다. 경상도 호족들이 잇달아 고려로 돌아서며 형세가 기울었다.

왜?공산 패배 뒤 두 나라는 경상도 북부를 두고 다시 맞붙었다. 안동 지역 호족 김선평·권행·장정필이 고려 편에 서서 함께 싸운 것이 승부를 갈랐다.

그 뒤이 승리로 경상도의 30여 성이 고려에 귀부하며 주도권이 고려로 넘어갔다. 안동 권씨·김씨·장씨가 이때 공을 세운 세 사람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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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5

견훤의 귀순, 신라의 항복

아들 신검에게 금산사에 유폐된 견훤이 탈출해 고려에 귀순했다. 같은 해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넘겼다.

왜?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맏아들 신검이 정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를 금산사에 가뒀다. 경주 일대만 남은 신라의 경순왕은 더 이상 백성을 괴롭힐 수 없다며 나라를 넘기기로 했다.

그 뒤왕건은 견훤을 "상보(尙父)"로 높여 대접하고, 경순왕에게는 딸을 시집보내고 경주를 맡겼다(사심관). 귀순한 적을 후대하는 모습은 남은 후백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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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6

일리천 전투, 통일

왕건이 일리천(구미 선산)에서 신검의 후백제군을 격파했다. 후백제가 멸망하며 후삼국이 하나가 되었다.

왜?귀순한 견훤이 직접 왕건에게 아들 신검을 치자고 청했다. 견훤이 앞장선 고려군 앞에서 후백제 장수들이 잇달아 항복했다.

그 뒤신검이 항복하며 후백제가 멸망했다. 고려는 거란에 망한 발해의 유민(세자 대광현 등)까지 받아들여 더 넓은 의미의 통일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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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위키백과: 후삼국 시대 · 위키백과: 공산 전투 · 위키백과: 일리천 전투

지도의 영역·경계는 개략적이며, 고대와 신라 말~후삼국 초의 세력권은 추정입니다. 그림 가운데 '역사 상상도'는 AI로 재현한 이미지로 실제 기록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