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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3~1019 · 거란(요)이 세 차례 고려를 침입했다. 1차 때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 설치의 발판을 얻었고, 3차 때 강감찬이 귀주대첩으로 대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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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손녕의 거란군이 봉산군을 깨뜨리고 내려왔으나 안융진에서 막혔다. 서희는 적진에 가서 고려가 고구려를 이은 나라임을 내세워 거란군을 물러가게 하고, 압록강 동쪽으로 나아갈 외교적 발판을 얻었다.
왜?송과 맞서던 거란은 송을 치기 전에 송과 가까운 고려를 눌러 배후를 안정시키려 했다.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해 왔다(942년 거란이 보낸 낙타를 굶겨 죽인 만부교 사건).
그 뒤서희는 거란의 속셈이 "송과 관계를 끊으라"는 데 있음을 간파하고, 거란과 교류하려면 길을 막고 있는 여진 땅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압록강 동쪽 진출을 인정받았다. 고려는 이후(994~996) 그 지역의 여진을 몰아내고 성을 쌓아 강동 6주를 설치했다.
이 장면을 지도로 보기 →거란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쳐들어와 개경이 불탔다. 현종은 나주까지 피란했고, 거란군은 퇴각길에 양규 등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왜?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고 강동 6주를 요새로 만들자 거란은 6주를 되찾으려 했다. 마침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고 죽인 정변이 일어나, 거란은 "임금을 죽인 죄를 묻는다"는 구실을 얻었다.
그 뒤거란은 현종이 직접 찾아와 인사(입조)하는 조건으로 물러났다. 현종이 끝내 가지 않자 거란은 다시 쳐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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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배압의 10만 대군이 개경 가까이 왔다가 물러갈 때, 강감찬이 귀주에서 크게 무찔렀다.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에 불과했다고 한다.
왜?현종의 입조 거부와 강동 6주 반환 거부에 거란이 세 번째로 침입했다. 고려는 들판의 곡식과 사람을 성안으로 거둬들이는 청야 전술로 맞섰고, 개경 근처까지 왔던 거란군은 지쳐 돌아가던 길에 귀주에서 강감찬에게 붙잡혔다.
그 뒤이후 고려·송·거란 사이에 세력 균형이 이뤄져 약 100년간 평화가 이어졌다.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북쪽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았다.
이 장면을 지도로 보기 →위키백과: 고려-거란 전쟁 · 위키백과: 귀주 대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동육주
지도의 영역·경계는 개략적이며, 고대와 신라 말~후삼국 초의 세력권은 추정입니다. 그림 가운데 '역사 상상도'는 AI로 재현한 이미지로 실제 기록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