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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정유재란

1592~1598 ·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7년 전쟁. 개전 20일 만에 한양이 함락되었으나 이순신의 수군과 각지 의병, 명군의 참전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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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별 이야기 (9)

1592-04-13 (음력)

일본군 부산 상륙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가 부산포에 상륙했다. 이튿날 부산진성(첨사 정발), 15일 동래성(부사 송상현)이 함락되었다.

왜?16세기 조선에서는 지방에서 성장한 사림이 훈구 세력과 부딪치며 여러 차례 사화를 겪은 끝에 선조 때 정치의 중심이 되었고, 곧 붕당으로 나뉘었다. 바다 건너에서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 동안 커진 다이묘들의 무력을 밖으로 돌리고 명을 정복하려 했다. "명을 치러 갈 테니 길을 빌려 달라"는 요구를 조선이 거절하자 침공했다. 조선은 1590년 통신사를 보냈지만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보고가 엇갈려 대비가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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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04-28 (음력)

탄금대 전투

신립이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으나 패배했다. 북상하는 일본군을 막을 마지막 방어가 무너졌다.

왜?조선은 200년 가까운 평화로 군사 제도가 무너져 있었고, 일본군은 전국 시대를 거친 숙련병에 조총까지 갖췄다. 신립은 기병을 살리려 탄금대 평야에 진을 쳤는데, 험한 조령(문경새재)을 버린 것이 패인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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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05-03 (음력)

한양 함락

선조는 4월 30일 한양을 떠나 피란했고, 5월 3일 일본군이 한양에 입성했다. 상륙 후 불과 20일 만이다.

왜?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지자 선조는 도성을 버렸다. 분노한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질렀다는 기록도 있다.

그 뒤일본군은 한양에서 갈라져 고니시는 평안도로, 가토는 함경도로 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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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05-07 ~ 07-08 (음력)

이순신의 남해 제해권 장악

학익진으로 일본 함대를 감싸 포격하는 조선 수군 (역사 상상도)
학익진으로 일본 함대를 감싸 포격하는 조선 수군 (역사 상상도) · AI 재현

옥포해전(5.7)을 시작으로 연승을 거두었고, 7월 8일 한산도대첩에서 학익진으로 일본 수군을 크게 격파했다. 서해를 통한 일본군의 보급로가 막혔다.

왜?이순신은 전쟁 전부터 거북선을 만들고 판옥선과 화포를 정비해 두었다. 배를 붙여 올라타는 백병전에 능한 일본 수군에 맞서, 크고 튼튼한 판옥선에서 화포로 멀리서 깨뜨리는 전술을 썼다.

그 뒤조선 수군의 연승은 일본군의 서해 진출과 해상 보급에 큰 타격을 주었다. 곡창 전라도도 지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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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06-15 (음력)

평양 함락, 선조 의주로

일본군이 평양을 점령하고, 선조는 의주까지 피란해 명에 원군을 요청했다. 한편 곽재우·고경명·조헌 등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왜?선조는 압록강 너머 명으로 망명까지 고민할 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조정을 둘로 나눠 광해군에게 맡기고(분조), 각지를 돌며 민심을 수습하게 했다.

그 뒤곽재우(경상)·고경명·김천일(전라)·조헌(충청) 등의 의병과 휴정·유정의 승병이 일어나 일본군의 보급로를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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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10 (음력)

진주대첩

김시민이 이끄는 3천여 명이 진주성에서 일본군 대군을 막아냈다. 곡창 지대인 전라도로 가는 길을 지켰다.

왜?진주는 경상도에서 곡창 전라도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일본군이 반드시 빼앗으려 했다.

그 뒤김시민은 이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숨졌다. 이듬해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성이 함락되어 수만 명이 희생되었다. 논개 이야기가 이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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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01 ~ 02 (음력)

평양성 탈환, 행주대첩

1월 이여송의 명군과 조선군이 평양성을 탈환했다. 2월 12일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일본군은 4월 한양에서 철수해 남해안으로 물러났고, 강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왜?조선의 거듭된 요청과, 일본군이 명 국경까지 밀려올 것을 걱정한 명이 이여송의 4만여 대군을 보냈다.

그 뒤명군은 벽제관에서 일본군에 패한 뒤 싸움을 피하고 강화 협상에 나섰다. 협상은 조선을 빼놓은 채 명과 일본 사이에서 3년 넘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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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07 ~ 09-16 (음력)

정유재란 — 칠천량에서 명량까지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군이 다시 쳐들어왔다.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이 궤멸했다. 다시 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9월 16일 남은 13척으로 울돌목(명량)에서 일본 함대를 격퇴했다.

왜?히데요시는 조선 남쪽 4도 할양 등을 요구했지만, 명은 그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데 그쳤다. 협상이 깨지자 1597년 다시 침공했다. 그사이 이순신은 모함으로 파직되어 백의종군 중이었고, 원균이 이끈 수군이 칠천량에서 무너졌다.

그 뒤명량의 승리로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이 다시 막혔다. 육지에서도 직산 전투 등으로 일본군의 북상이 저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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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11-19 (음력)

노량해전, 전쟁 종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8월에 죽자 일본군은 철수에 나섰다. 퇴로를 막은 조·명 연합 수군이 노량에서 일본 함대를 격파했고,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왜?히데요시는 죽으며 철군을 명했다. 조·명 연합 수군은 순천 왜성의 고니시 부대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 했고, 고니시를 구하러 온 시마즈의 함대를 노량에서 맞았다.

그 뒤7년 전쟁으로 조선은 인구와 농토가 크게 줄고 많은 문화재가 불탔다. 명은 국력이 기울어 훗날 청에 무너지는 원인이 되었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았다. 끌려간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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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위키백과: 임진왜란 · 위키백과: 한산도 대첩 · 위키백과: 명량 해전 · 위키백과: 노량 해전 · 우리역사넷: 이순신과 한산도 대첩 · 조선왕조실록사전: 가등청정

지도의 영역·경계는 개략적이며, 고대와 신라 말~후삼국 초의 세력권은 추정입니다. 그림 가운데 '역사 상상도'는 AI로 재현한 이미지로 실제 기록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