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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1273 · 1231년부터 30년 가까이 몽골이 여러 차례 침입했다. 고려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버텼고, 개경 환도 뒤 삼별초가 1273년까지 저항했다.
지도로 보기살리타의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너 개경을 포위했다. 박서가 지킨 귀주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왜?1219년 고려와 몽골은 강동성에 숨어든 거란 잔당을 함께 무찌르며 처음 손을 잡았다. 그러나 이후 몽골의 공물 요구가 지나쳤고,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가 돌아가던 길에 피살되자 몽골은 이를 구실로 쳐들어왔다.
이 장면을 지도로 보기 →최우 정권이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장기 항전에 들어갔다. 같은 해 처인성(용인)에서 승려 김윤후가 살리타를 사살했다.
왜?몽골은 감독관(다루가치)을 남기고 물러가며 무리한 요구를 이어 갔다. 최씨 무신 정권은 기병 위주의 몽골군이 바다에 약하다고 보고, 섬인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장기전에 들어갔다.
그 뒤정권은 강화도에서 버텼지만, 본토의 백성은 산성과 섬으로 피란하며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이 장면을 지도로 보기 →몽골군은 남쪽 끝까지 휩쓸었다. 황룡사 9층 목탑이 불탔고, 고려는 부처의 힘으로 막겠다며 팔만대장경을 새겼다.
왜?강화도를 공략하지 못한 몽골은 본토를 철저히 짓밟아 고려 조정의 항복을 끌어내려 했다.
그 뒤1258년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1259년 고려는 몽골과 강화했다. 이후 원의 간섭을 받게 되지만, 몽골이 정복한 나라 가운데 드물게 왕조와 고유 풍속을 지켰다.
이 장면을 지도로 보기 →개경 환도에 반발한 삼별초가 진도로, 다시 제주로 옮겨 싸웠으나 1273년 여몽 연합군에게 진압되었다.
왜?삼별초는 최씨 정권의 군사 기반이었다. 몽골과의 강화와 개경 환도는 곧 그들의 몰락을 뜻했고, 원종이 해산을 명하자 배중손 등이 왕족 왕온을 왕으로 세우고 봉기했다.
그 뒤진압 뒤 원은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두고 말 목장을 운영했다. 고려는 두 차례 원의 일본 원정(1274, 1281)에 군사와 배를 대야 했다.
이 장면을 지도로 보기 →위키백과: 여몽전쟁 · 위키백과: 삼별초 · 위키백과: 팔만대장경
지도의 영역·경계는 개략적이며, 고대와 신라 말~후삼국 초의 세력권은 추정입니다. 그림 가운데 '역사 상상도'는 AI로 재현한 이미지로 실제 기록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