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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53 ·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멈춘 전쟁. 낙동강까지 밀렸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후퇴한 뒤 현재의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고착되었다.
지도로 보기새벽 4시경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했다. 옹진·개성·의정부·춘천·동해안 축선으로 동시에 밀고 내려왔다. 같은 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 82호로 북한의 침략 중지와 38선 이북 철수를 요구했다.
왜?김일성은 무력 통일을 계획하고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었다. 소련은 탱크와 무기를, 중국은 국공 내전을 치른 조선인 부대를 넘겨주었다. 반면 남한에는 탱크가 한 대도 없었고, 1950년 1월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은 한반도를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빼는 발언을 했다.
이 장면을 지도로 보기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같은 날 새벽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어 많은 피란민이 희생되고 국군 주력의 퇴로가 끊겼다. 6월 27일 유엔 안보리는 결의 83호로 회원국의 군사 지원을 권고했다.
왜?국군은 57mm 대전차포와 2.36인치 로켓포를 보유했지만, 전력과 운용 여건이 부족해 북한군 T-34 전차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어려웠다. 정부는 서울을 지키겠다고 방송하면서 서울을 빠져나갔고, 북한군의 남하를 늦추려 한강교를 서둘러 폭파했다.
그 뒤유엔 안보리는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결의를 통과시켰다. 전투 병력을 보낸 나라는 16개국이었다. 의료지원국은 전쟁 중 활동한 5개국과 정전 뒤 지원한 서독을 포함해 현재 6개국으로 집계한다.
이 장면을 지도로 보기 →미 24사단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첫 교전을 벌였으나 전차를 막지 못하고 후퇴했다.
왜?일본에 주둔하던 미군은 북한군을 얕보고 소규모 부대를 먼저 보냈다. 대전차 무기가 부족해 T-34를 막지 못했다.
그 뒤미군은 시간을 버는 지연전을 펴며 낙동강 방어선을 준비했다.
이 장면을 지도로 보기 →금강 방어선이 뚫리고 대전이 함락되었다. 미 24사단장 딘 소장이 실종(이후 포로)되었다. 전선은 계속 남쪽으로 밀렸다.
왜?대전은 개전 직후의 임시 수도였다. 미 24사단은 이곳에서 버티며 증원 병력이 도착할 시간을 벌었다.
그 뒤정부는 대구를 거쳐 8월 부산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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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과 영덕을 잇는 방어선(이른바 부산 교두보)까지 밀렸다. 다부동 전투 등 치열한 방어전 끝에 대구와 부산을 지켜냈다. 국토의 대부분이 북한군 점령하에 들어갔던 시기다.
왜?낙동강은 천연 해자 역할을 했고, 부산항으로 미군 병력과 물자가 계속 들어왔다. 반대로 북한군은 보급선이 길어지고 미 공군의 폭격에 시달렸다.
그 뒤다부동에서는 학도병까지 투입된 국군 1사단이 북한군 3개 사단을 막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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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가 지휘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해 북한군의 보급선을 끊었다.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도 총반격이 시작되었다.
왜?북한군 주력이 낙동강에 묶인 사이 허리를 끊으려는 작전이었다.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9m가 넘고 갯벌이 넓어 반대가 많았지만, 맥아더는 바로 그 때문에 북한이 방심할 것이라 보았다.
이 장면을 지도로 보기 →함락 3개월 만에 서울을 되찾았다.
왜?보급로가 끊긴 북한군이 무너지며 북쪽으로 후퇴했다.
그 뒤석 달의 점령 기간 동안 인민재판과 의용군 강제 징집이, 수복 뒤에는 부역자 처벌이 이어지며 민간인 희생이 컸다.
이 장면을 지도로 보기 →10월 1일 국군이 동해안에서 38선을 돌파했다(국군의 날 유래).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했고, 10월 26일 국군 6사단 7연대가 초산에서 압록강에 도달했다.
왜?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주장했고, 유엔은 10월 7일 한반도 통일을 위한 북진을 승인했다.
그 뒤국군과 유엔군은 통일이 눈앞에 왔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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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일경부터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이 10월 25일 첫 공세를 시작했다. 11월 말 대공세로 유엔군은 전면 후퇴했다. 동부 전선에서는 장진호 전투(11.27~12.11) 뒤 흥남 철수(12.15~24)로 국군·유엔군 약 10만 5천 명과 피란민 약 9만~10만 명이 바다를 통해 철수했다.
왜?중국은 미군이 압록강까지 올라오면 자국 안보가 위협받는다고 보고, "항미원조"를 내걸고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했다. 산악 지대 야간 기습과 대규모 병력으로 유엔군을 밀어냈다.
그 뒤흥남 철수 때 국군·유엔군과 함께 피란민 약 9만~10만 명이 군함과 화물선에 올랐다. 메러디스 빅토리호 한 척에만 1만 4천여 명이 탔다.
이 장면을 지도로 보기 →중공군의 신정 공세로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전선은 평택–원주–삼척 부근까지 밀렸다.
왜?중공군이 38선을 넘어 대공세를 펴자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비웠다.
그 뒤혹독한 겨울, 수많은 피란민이 남쪽으로 향했다. 이 무렵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징집된 청년 수만 명이 굶주림과 추위로 숨졌다.
이 장면을 지도로 보기 →유엔군의 반격으로 서울을 다시 되찾았다. 이후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오르내렸고,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다. 이후 2년간 고지 쟁탈전이 이어졌다.
왜?리지웨이 장군이 이끈 유엔군이 화력을 앞세워 반격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상대를 완전히 몰아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 뒤협상은 포로 송환 문제 등으로 2년을 끌었고, 그동안 백마고지·펀치볼 같은 고지에서 땅 한 뼘을 두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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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전투가 멈춘 접촉선이 군사분계선이 되었고, 양쪽 2km씩 비무장지대가 설정되었다. 평화조약이 아닌 정전 상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왜?1953년 스탈린이 죽고 휴전을 공약한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협상이 급물살을 탔다.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해 반공 포로를 석방했고, 한국은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 뒤10월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맺어졌다. 3년의 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죽거나 다쳤고, "이산가족 1천만"이라는 말이 생겼다.
이 장면을 지도로 보기 →위키백과: 한국 전쟁 · 위키백과: 낙동강 방어선 · 위키백과: 인천 상륙 작전 · 위키백과: 흥남 철수 · 위키백과: 한국 휴전 협정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기 피아 지상무기의 운용 · 국가보훈부 유엔참전용사 아카이브: 의료지원 · 국가보훈부 유엔참전용사 아카이브: 흥남 철수
지도의 영역·경계는 개략적이며, 고대와 신라 말~후삼국 초의 세력권은 추정입니다. 그림 가운데 '역사 상상도'는 AI로 재현한 이미지로 실제 기록이 아닙니다.